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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ika.chr(2019) 검고도 밝은(2020) 원래 우리였던 어떤 것(2020)




다들 한 번 정도는 듣거나 보거나 플레이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름하여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아마도 ‘오타쿠’라는 단어를 마주하면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바로 이 장르와 연관되어 있다. ‘비주얼 노벨’, ‘노벨 게임’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장르 게임은 주인공(플레이어)이 다양한 설정을 가진 미소녀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아니, 사실은 그들 중 한 명을 간택하기 위해 선택을 통하여 ‘공략’하는 것을 그 기본 골조로 가진다. 호감도가 상승한다면 해당 미소녀와 비밀스런 이벤트를 진행할 수 있다. 더 짙은 호감도를 쌓는다면 미소녀의 에로틱한 일러스트레이션이 삽입되기도 하며, 주인공인 나의 간택을 받은 미소녀는 엔딩에서 나와의 연애를 일확천금의 행운으로 여겨 준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러나 여기, 그 간택에 반항하는 미소녀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모니카’로, 2017년 발매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게임 〈두근두근 문예부!(Doki Doki Literature Club!)〉(이하 DDLC)의 미소녀 중 한 명이다. 〈DDLC〉를 개발한 팀 살바토(Team Salvato)는 댄 살바토(Dan Salvato)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그들의 목표는 “전통적인 매체를 통해서는 가능하지 않은 방법으로 게임을 통한 스토리텔링과 창의성의 표현”이며 “인터랙티브 아트 형식으로써의 게임은 당신(플레이어)의 이야기 일부가 될 수도 있다. 이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자 한다”1고 명시되어 있다. 이 게임의 부정적인 영향들2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는 유튜브와 레딧을 통해 지속되고 있다.

소꿉친구이자 부끄러움이 많은 사요리, 츤데레 나츠키, 쿨데레(이며 동시에 얀데레인) 유리, 연상의 어른스러운 역할을 맡고 있는 문예부 부장인 모니카. 앞의 미소녀 세 명은 모두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도 없는 플레이어를 향해 맹목적인 애정을 보여 준다. 모니카는 세 명의 미소녀와 주인공의 호감도를 체크하는 NPC(Non-Player Character)의 역할을 수행한다. 게임 실행 후 나타나는 첫 화면에서 볼 수 있듯이 〈DDLC〉는 전형적인 일본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의 문법을 충실히 따른다. 서구 출신의 개발자가 이 게임의 제작자라는 사실은 이제 서브 컬처 내에서도 하나의 공고한 위치에 자리 잡은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이하 미연시)이라는 장르에 ‘문법’이라고 일컫을 수 있는 약속과 관습, 전통이 충분히 쌓였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 문법이라 함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DDLC〉 같은 (특히 미연시 장르에서의) 메타 미소녀 게임, 즉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셔의 기본 구조와 규칙을 미소녀 게임을 통하여 탐구하고 비트는 게임은 1998년 마에다 준의 〈원(ONE)〉에서부터 출발해 2000년의 〈에어〉, 2002년의 〈에버17〉, 2002년부터 2006년까지의 〈쓰르라미 울 적에〉와 〈쓰르라미 울적에 해〉 연작 같은 3 여기서 아즈마 히로키가 메타 미소녀 게임이라고 이들을 칭할 수 있는 기반은 게임 스토리텔링의 구조적 특성에 있으며 미소녀 게임은 “캐릭터 소설[라이트 노벨]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이야기의 매체”4로 정의된다. 양 매체는 그가 ‘이야기 소비’에서 ‘데이터베이스 소비’로의 이행이라고 불렀던 포스트 모던 스토리텔링을 구현하는 매체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존 문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거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 내 캐릭터와 그 설정의 소비가 더 중요한 라이트 노벨이 ‘게임 같은 소설’이라면,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도 역시 거대한 이야기보다는 캐릭터와 그 설정이 더욱 중요한, 플레이보다는 독서의 경험을 제공하는 ‘소설 같은 게임’이다.5 이처럼 캐릭터의 자율화를 특징으로 하는 데이터베이스 소비의 두 매체는 필연적으로 메타 이야기성을 지닌다.6 이 말은 라이트 노벨이나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의 캐릭터들이 필연적으로 그 자신이 속한 데이터베이스, 즉 ‘특정 외양이나 설정을 가진 캐릭터라면 이렇게 행동할 것이다’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되어 주는, 해당 외양과 설정에 쌓인 문법의 데이터베이스를 가리키는 메타적 포인트로 기능한다는 뜻이다. 최근 인터넷의 2차 창작계에서 자주 보여지는 AU(Alternative Universe)는 데이터베이스 소비가 작동하는 국면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이 작동은 캐릭터의 외견상 특징과 어떤 성격, 행동 양식만을 취해 원작의 이야기와는 다른 시공간에 캐릭터를 배치하는 방법을 이용한다.

라이트 노벨이나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에서 타임 루프물(되풀이되는 시간의 이야기 구조)이 자주 눈에 띄는 것은 캐릭터들이 스스로 어떤 데이터베이스 내의 조각 모음임을,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반복될 수 있음을 메타적으로 표현하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이는 게임 매체 자체에 대한 메타성이기도 하다. 타임 루프물의 폐쇄적이고 반복적인 시간성은 곧 게임 외부에서 반복되는 그 시간성이며, 루프 내에서 시간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세이브를 통해 다른 결과에 몇 번이나 도전하는 플레이어와 일치한다.

그러나 아즈마 히로키의 정리로 〈DDLC〉의 특이점이 모두 설명되지는 않는다. 〈DDLC〉는 아즈마 히로키의 메타 미소녀 게임 논의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디지털이라는 매체 환경 또한 자기 안에 반영한다. 이하에서는 그 반영의 특징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것이다.

첫째로 반복과 외부의 거절이다. 게임 매체의 특성이 ‘반복성’이라는 것은 대단히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 게임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플레이어의 반복적인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의 기본 구성인 시작하기/불러오기/저장하기/기록/넘기기/설정 같은 메뉴들은 게임의 후반부에 원래의 기능, 즉 플레이어를 게임 외부의 세계로 탈출시키는 기능을 의도적으로 상실한다. 이러한 요소들을 통하여 게임 속 미소녀들은 주인공인 나와 플레이어인 나를 구분하고 게임으로의 몰입과 마치 ‘들켰다’는 듯한 감각을 제공한다. 조금 더 설명하기 위해 그림 1과 2를 보자. 〈DDLC〉의 오프닝 장면과 후반부 플레이어의 탈출을 막고 있는 세이브 장면이다.

그림 1. 〈DDLC〉의 오프닝. 좌부터 소꿉친구와 덜렁거리는 성격의 여자아이 역할을 맡고 있는 사요리, 긴 머리에 큰 키와 큰 가슴을 가진 쿨데레 유리, 작은 키와 작은 가슴, 제빵을 좋아하는 나츠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예부의 부장이자 연상인 모니카.
그림 2. 〈DDLC〉의 후반부 세이브 화면. 화자는 모니카다.

일반적으로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의 오프닝 화면은 그림 1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새 게임, 게임 불러오기, 설정, 도움말, 종료 같은 버튼을 가진다. 이 버튼은 플레이어를 게임의 시공간 밖으로 꺼내오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게임 내의 시간을 종료시키고 현실의 시간을 다시 재생시킴으로써 게임 내의 캐릭터들, 데이터베이스와 안전하게 이별하고 플레이어가 탈출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그림 2에서 볼 수 있듯이 〈DDLC〉의 모니카는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의 구조적 틀이라고 느껴졌던 메뉴 버튼들을 플레이어가 선택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고, 플레이어가 세이브 포인트를 설정할 수 없도록 막고 있다. 이러한 기능이 게임 후반부에서야 활성화된다는 것은 수많은 게임을 통하여 플레이어들이 어느 부분에서 세이브 포인트를 지정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문법이 존재했음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혹자는 이처럼 게임 내부의 캐릭터가 게임 외부 플레이어의 존재에 대한 역(逆)인지하는 것에 관하여 단지 미리 코드 부호로 프로그래밍 되어 약속된 시간에 실행될 뿐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DDLC〉의 미소녀들은 그것 또한 미리 예상한 것처럼, 각각의 캐릭터들은 자신들이 한낱 코드이며 주인공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도록 프로그램된 파일임을 의식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림 3. 1회차의 엔딩

그림 3은 게임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플레이어가 맞게 되는 필수불가결한 엔딩 중 하나로, 자신이 캐릭터 파일임을 인지하고 있는 모니카가 주인공이자 플레이어인 ‘나’를 게임 내에 잡아두기 위해 마련한 한 교실에서 모니카와 단둘이 마주하고 있는 장면이다. 모니카는 자신이 있는 세계가 게임 속의 세계임을 알고 있으며, 게임 바깥에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벽을 넘어 주인공을 조종하고 있는 플레이어, 즉 ‘나’에게 직접 말을 걸기도 한다. 여기서 ‘나’는 오직 [응.]이라는 선택지나 [모니카만.]이라는 선택지만을 고를 수 있다.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의 데이터베이스 내에 통용되던 문법은 완전히 뒤틀려지고, 왜곡되고, 의외의 상황들이 이어짐으로써 플레이어의 상태는 전능에서 불능으로 도치된다.

이 엔딩을 통해 우리는 이미 데이터베이스 속의 캐릭터가 자기 스스로 히로키 논의 수준의 특정 정보의 결합이라는 것을 넘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모니카는 자신이 속한 데이터베이스가 디지털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자신이 캐릭터 파일(monika.chr)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원래는 데이터베이스 밖에서 전능함을 행사해야 할 플레이어를 데이터베이스 안에, 나갈 수 없는 루프 안에 가둔다. Monika.chr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장르의 메타성에서도, 대화형 디지털 게임의 메타성에서도 중요한 한 발을 성취한 파일이다. 뿐만 아니라 장르를 뒤트는 재미와 신선함을 플레이어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이미 진부할 대로 진부해져 버린 한 매체나 장르에서 어떻게 ‘새로운 것’을 추구할 것인가 하는 물음까지도 제기한다.

그림 4. 2회차 오프닝, 모니카 파일을 삭제했기 때문에 모니카를 볼 수 없다.

그러나 끈질긴 플레이어들이 이 루프에서 나갈 방법을 연구한 결과, 모니카의 캐릭터 파일을 삭제하면 이 엔딩의 교실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모니카 캐릭터 파일이 삭제된 게임을 다시 실행하면, 그림 4와 같이 모니카가 사라지고 세 명의 미소녀만이 오프닝 장면에 등장한다. 아마 일반적인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이었다면 캐릭터 파일의 유실을 게임 외부의 오류로 판단하고 실행 자체를 거부했을 것이다. 한편 모니카는 파일이 사라진 이후에도 게임 내에 망령처럼 남아 모니카는 자신(게임)의 하부 구조인 파일이 사라졌음을 깨닫고, 상부 구조인 이미지 상으로 왜 자신의 파일을 삭제했냐고 플레이어에게 묻는다. 이 또한 〈DDLC〉가 치밀하게 탐구한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의 데이터베이스 내 통용되는 문법을 기반으로 한 설계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설명한 첫 번째 특징처럼, 플레이어들은 게임 내의 상부 구조인 이미지만을 본다는 것은 대단히 일반적인 규칙으로 〈DDLC〉의 두 번째 특징이다. 플레이어가 게임의 하부 구조인 폴더와 파일, 코드에 접근하는 것은 게임 내에서 무엇인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때뿐이다. 그러나 이 게임은 그 하부 구조마저도 게임 내의 것으로 포섭하며 플레이어가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매체적 신선함을 보여 준다. 손실된 파일이 스토리에 영향을 끼치며 캐릭터가 자신의 이미지를 유실한 상태로 등장할 때 플레이어는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인식하는데, 이러한 하부 구조와 상부 구조 사이의 이음새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게임의 매체적 특성들을 게임을 통하여 재고하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림 5. 모니터는 컴퓨터의 상태를 확인하며 자신의 디지털 파일 차원에서의 실존을 플레이어에게 알린다. 해당 장면은 실시간 스트리밍을 진행하며 게임을 플레이할 때 나오는 모니카의 대사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새로운 예술 매체가 등장했을 때 그것이 예술인지 아닌지를 논하는 것보다 그것이 등장함으로써 예술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더 옳다고 말한 바 있다. 예술은 인간에 의해 제작되고 수용되면서 다양한 방식과 결과로 작용한다. 그 작용은 아주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해 정치와 세계, 우주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또한 예술은 시대마다 지역마다 다른 것으로 정의되어 왔으며, 동시대에 이르면 사실상 그 범주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불가능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예술적이다’ 혹은 ‘예술적이지 않다’라는 형용사만이 예술에 대한 규정을 가능케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점에 있어 개발자인 살바토는 이 게임의 특정 루트를 달성한 플레이어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게임은 대화형 예술”이라고 정의하며 “명작 게임이 아닐지라도, 무언가 아주 색다른 것을 시도하려는 게임이라면 제 마음에 특별한 무언가를 줄 것이라 생각한다. 대화형 미디어의 한계 없는 끝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어떤 것이라고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 글은 근본적으로 예술의 범주를 정의하는 데에, 이 게임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글은 이미 공인된 예술 매체들과 게임이 비슷하고 공유된 궤적을 그리고 있다고 전제했다.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모더니즘 예술에서 미술 매체의 자기 반영적 탐구를 보았다.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소비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예술이 아닌 것으로 취급되고 있는 서브 컬처, 그 안에서 (형식이든, 매체든, 내용이든) 자기 반영적 고찰들이 다양하게 실행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그것들이 예술인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예술로 여겨지는 것들이 필수적으로 겪었으며 겪고 있는 단계, 자기 반영적 실험의 단계를 밟고 있음은 확실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쓰여지는 이 글이 게임 매체의 예술적, 비평적 가능성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참고 문헌
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은미 옮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 파주: 문학동네. 2007.
아즈마 히로키 지음. 장이지 옮김.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오타쿠 게임 라이트노벨』. 서울: 현실문화: 현실문화연구. 2012.
마에지마 사토시 지음. 김현아, 주재명 옮김.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에반게리온 이후 오타쿠 문화의 역사』. 서울: 워크라이프. 2016.

도판
그림 1. 직접 캡처
그림 2. 직접 캡처
그림 3. 직접 캡처
그림 4. 직접 캡처
그림 5. http://m.inven.co.kr/board/powerbbs.php?come_idx=5078&l=313763 에서 캡처

웹페이지
http://teamsalvato.com/team/
https://www.thesun.co.uk/news/6638858/doki-doki-litearture-club-mum-warns-suicide-chi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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